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년 추도식을 맞이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알아보는 포스팅을 써볼려고 합니다.
사실 젊은사람들은 노무현이 어떤사람이고 어떤 대통령을 했고 어떻게 대통령에 당선됬는지에 대해서 잘 모를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노무현에 관해서 알아보는 포스팅을 준비하였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 노씨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그의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보고 노무현은 어떤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어서 독학으로 1975년 제 17회 사법 시험에 통과하여서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일을 하였다. 대전지방 법원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시을 개업하며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서 제13대총선에 출마하여 부산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 특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0년 3당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을 한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였으며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 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 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력직 재임중 탄핵 소추를 당 대통령 직무가 잠깐 정지된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 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후 헌법 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한다.
노무현의 생애 대해서 알아보자
노무현은 1946년 9월1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사이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위 위로 있는 형 2명중 맏형 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형 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1953년에 진영대창 국민학교에 입학 하였고 학업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인해 결석이 매우 잦았다고한다.
6학년때는 담임 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중학교 재학 당시 노무현은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
졸업후에는 농업협동조합의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으며 이후에 막노동을 하면서 사시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인권 변호사 노무현
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이후에는 세무,회계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으며 세무 회계사건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당시에는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등 여유롭게 생활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 하라고 권유하였으며 ,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 하였으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에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노무현은 1982년에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으며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 위원장을 맡게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후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방해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으며 1987년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노무현은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 조사 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 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다고 줒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등의 언행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기시작하였다.
이것이 노무현에 역사이다. 노무현의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 그리고 인권변호사가 되기 까지의 과정이다.
그 이후로는 정치적 성향이 들어가서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노무현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포스팅할려고 한다.
정치이야기는 사람들끼리 틀린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많은 싸움이 날수가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인권변호사가 되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만 알아볼려고 쓴 포스팅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바란다.
서거 10주년을 위해 노무현에 대해서 포스팅해봤다. 여러분도 노무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기억하길 바란다.
그리고 서거 10주년 특별 영화로 노무현과 바보들이란 영화가 나온다. 이는 논무현에 대한 내용으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은 위에 설명했던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부터 시작해서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서거에 대한 내용까지 설명을 하며 그로부터 10년 노무현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노무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영화를 보는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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